#1. 연재당시에 다 못 봤는데 (책보다가 화면으로 보면 집중이 잘 안되는듯)
나중에 다시 들어가 보니 없어져서 (아마 출판되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정말 책으로 묶여서 나왔다)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다가 마침 있어서...빌려왔는데 웬걸. 너무 얇다. (인터넷에 연재된 걸로 보면 좀 더 나올 것 같은데. 편집을 하면 이렇게 되나? 아니면 내용이 좀 바뀌었나? ) 맨 뒤를 살짝 봤더니...어라 ? 이거 편집된거네 ? (작가의 말에 보니까...인터넷에 올렸을 때의 분량 중에 절반을 줄였다고 했다)
아마...1부, 2부. 이런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후반부는 책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2. 시설에서 나와 버린 ‘나(진만)’와 ‘시봉’이 있다. 소설은 진만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그 둘은 시설의 ‘기둥’ 이었다. 시설의 ‘기둥’이자 ‘반장’인 그들의 하루 일과는 기가 막히다.
반장의 임무는 원생들의 죄를 일일이 물어서 나중에 사회복지사들 앞에서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시설에서 일(포장)하고, 그곳에서 주는 약을 먹고, 고해성사(?)를 한다.
진만과 시봉은 시설의 여러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묻고,
복지사들 앞에서 그 죄를 고해하고 무지하게 얻어 맞는다.
그리고 거짓말로 고해하고 얻어맞은 사실들에 대해선, 맞고 나서 그 사실들을 실행에 옮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저지르지도 않고, 맞고, 나중에 행동으로 옮기는...
뭔가 거꾸로 되었다. 어쨌든 간에 그냥 맞기만 하고 반항을 하지 못한다.
시설에 있는 사람들중 유일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 하지 않는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3. 여차저차해서 둘이 시설에서 나와서 시봉의 집으로 가지만, 시봉의 가족도 정상은 아니었다.
시연(시봉의 동생)과 같이 사는 남자는, 직업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뭔가 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 듯)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시연을 때린다. 그렇지만 시연은 그를 떠나지 못한다. 왜일까....)
그리고 그는 처남들(?)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일 좀하라고 하고.
그 남자의 말을 듣고서 그 둘은 사과 대행업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시봉과 진만 둘이서 대신 사과를 해 주는 것이다.
시설에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니면 남들의 잘못을 다 뒤집어쓰고 맞았듯이.
사회라는 더 큰 곳으로 나와서도, 대신 사과를 해 주는 것이다. (구타만 빠졌을 뿐 그들이 하는 일은 같다)
그렇지만 이들이 ‘대신’ 사과를 해 주는 장면이,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정말 잘못해서 사과한다기보다는 억지로 하는 것. 그리고, 정말 사과를 해야 할 당사자는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그리고 정말 사과를 해야 할 일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사소한 것들만이 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차고 넘치는 죄들, 수 많은 죄인들, 그리고 은근히 죄를 권하는 사회. 본인이 정말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알지만 덮어 버리는 사람들. 진만과 시봉의 시선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을 여러 부분들까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내 작품들 가운데서 빈번히 나타나는 주제 중 하나는 우리가 꿈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꿈들은 어디까지 조작될 수 있는 것일까? 수십 년 전부터 우리는 명성과 부와 권력을 모든 것에 우선시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순응해야 할 진정한 가치라고 믿고 있다 (저자의 말 중)
--------------------------- 작가의 말을 보고 나서, 그럼 이 책은 꿈의 ‘조작’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꿈을 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설 시작 전에 나오는 글들이 있다.
그 글들은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누가복음 12장 22~27절,
월트 휘트먼의 <풀잎>,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다. 기도문은 왜, 복음은 왜 나오고, 시는 또 왜 나오는가,
아무리 읽어 봐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구절들이었다.
왜 이 내용들이 소설 앞머리에 등장한 걸까.
시작부터 어딘가, 걸리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 도대체 뭔가...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여기서 승자는 누구고 패자는 누가 되는 걸까.
칸 영화제 기간에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러 온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슈퍼클래스와 가까워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나오고,
'현실 속'의 슈퍼클래스들이 등장한다. 현실 속의 슈퍼클래스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중략 )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슈퍼클래스는 자기 객실에 틀어박혀 이메일을 체크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제 파티라는 게 다 그게 그거라고 투덜대면서. 혹은 어떤 친구의 보석이 자기 것보다 크고, 라이벌이 새로 산 요트 장식이 아주 독특했다는 걸 떠올리면서 ‘말도 안 돼!’ 하고 분해하고 있을 뿐이다. (26p)
연례행사 정도라고 할까?마지못해 가는 휴가라고 할까?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모든 게 따분할 뿐이고,
영화제든 무슨 축제든 초대를 받았으니 가긴 가야 되는데,
딱히 가서 할 것도 없고, 그런 사람들이다.
그 반대쪽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있는
- 뭔가 하나 건지려고 온 사람들, 영화배우의 옆자리에 서서 입장하기를 꿈꾸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아닌 척, 관심 없는 척 보는 듯 하면서도,
연예계를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그들 세계의 단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환호를 보내지만, 내일 타블로이드 신문에 우상의 스캔들이 폭로되면 박수를 치는 게 바로 대중이야. 그들은 이렇게 말해. ‘불쌍한 것 같으니. 다행히도 난 이런 치들과는 달라.’ 오늘 그들은 숭배하지만 내일은 아무런 가책 없이 돌을 던지고 십자가에 못 박을걸. 그게 대중이야. “ (194-195p)
그러한 사람들이 뒤섞여서.... 칸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있다.
칸에서 그들의 꿈과 욕망들이 서로 부딪히고 뒤섞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목적 달성을 위해 한 세계를 무참히 파괴해 버리는 이고르는.. 영화제와는 전혀 상관 없는 위험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잡지 못하는 경찰은 뭔ㄱㅏ :: )
그가 파괴해버린 세계는 언뜻 보면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연결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일을 하나씩 마칠 때마다 계속 기도를 올리는데.
이것은 .. 일종의 정교도식.. 참회(?)일까. 의식일까 ?
혼자 들어왔지만 나중엔 혼자가 아닌 상태에서 조국으로 돌아가고.
그러나 동시에 혼자인 그. 이고르.
꼭 그래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 결국 다 연결되는 내용들
** 작가의 비판의식
*** 내 꿈은 ? 내가 원하는 것은 ?
‘우리는 중앙아프리카에 수면병이라는 병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을 공격하는 유사한 질병이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정 위험한 병이다. 병에 걸려도 초기에는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면 주의해야 한다! 이 병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영혼에게 피상적인 삶을 강요할 때 영혼이 너무나 고통당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다. 영혼은 아름답고 깊은 것들을 사랑한다. ’ (245p)
시작 부분을 살짝 놓쳤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 안 하는' 연애대행사 이야기이다. 극단 대표 병훈을 비록한 민영, 재필, 철빈 등이 지하 극장을 개조해 만든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이 극단을 하다가 생계 유지를 위해 급히 회사를 차린 것 같다.
이전에 그들이 연츨한 연극은 '시라노 드 베르쥬락',
실존 인물을 가지고 만든 연극인데, 아마 이것 한 편만 올리고 그 다음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첫 번째 작전이 성공하고 나서, 두 번째 의뢰인이 들어오는데,
두 번째 의뢰인 상용이 말하는 여자 희중은, 알고 보니 병훈의 옛 애인이었다.
병훈네는 상용에게 둘이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려고, 상용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조사하고),
뭔가를 연출하는데, 병훈이 희중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민영이 이를 눈치채고 이 작전에서 빠지라고 하지만, 병훈은 왠지 이번 작전을,,끝까지 밀고 나갈 것 같다.
오래 전에 들었었던 아그네스 발차 노래가 여기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시라노의 전체적인 내용보다도 영화 음악이 어느 장면에 나올까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딴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보게 된 것 같다.
노래는 그리스어로 나오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제목처럼.
'우리에게도 더 좋은 날이 되었네' 란 메시지를 전달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은 좋은 뜻을 담고 있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좋다~ 라기보다는 왠지 조금은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아무 생각 없이 들을 때는 그냥 듣고 지나쳤지만,
이런 장면이 나올 때 들어 보니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병훈이 옛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을 비롯해서 2번 정도 더 나오는 곡.
하지만 이 곡이 나올 때의 장면은 마음에 들었다.
깃털이 날리는 듯한..
무언가 흐르는 듯한 장면.
순식간에 몇 년 전으로 이동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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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ri mera ke ya mas (There'll be better days, even for us)
I will water the time with my salt tears ; I had grown used to spending bitter summers with you.
I will come back, don't be sad, say "It's all right.", there will be better days, even for us.
대학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걷는 학생들이 그들을 찾는 전화 한 통 때문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 전화는 학생 시절 자신들에게 끝없이 ‘생각하기’를 요구했던 윤교수의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을 부르는 전화였다. 8년 만에 전화를 건 친구에게 "어디야?" 라고 담담하게 묻기만 할 수 있을까.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친 친구도 아니었는데. 소설 속 등장인물들(윤, 명서, 미루, 단)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 답답한 시대 속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단지 시간이 오래 지났을 뿐,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 대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하루하루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거리로 나선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쫒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106-108p)
이들이 다니는 대학은 예대 특유의 분위기랄까, 이런 것이 있어서 무슨 돌아이(!)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곳이다.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지만 윤은 그 개성이 강한 사람들 속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을 하고 다시 복학을 하게 되었다. 윤이 사촌언니네 방 창문에 검은 도화지를 붙이고 밤낮없이 책만 읽는 모습은 좀 무서웠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학교는 왜 다니는지 모르겠고, 길거리는 시위대, 화염병, 바리케이드 천지고,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꼭 검은 도화지를 붙였어야 할까. 이 때 윤의 눈에 띈 사람들이 명서, 윤미루, 윤교수였다. 하지만, 윤교수가 텍스트 타이핑을 할 사람을 찾지 않았더라면, 윤이 명서와 미루를 주의깊게 살펴 보지 않았더라면, 이들이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비록 학교 밖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윤을 포함한 이들은 대학생으로서 일종의 특권을 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마주치고, 여러 번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답답한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는 건 공통점일 수 있으나, 여기서 이들은 지금 우리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 학점과 취업에 목을 맨- 현실과 너무도 달라서 끌리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우리 중에 ‘쉴 새 없이 노래부르거나 한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것(29p)' 을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성곽 순례, 문장 이어쓰기 놀이 등. 이런 것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 '걷기'는 윤이 서울 생활을 하면서 시작한 새로운 취미생활이었다. 아마도 이 ‘걷기’가 아니었더라면 윤은 1년 전 명서와 만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필 그날은 명서의 말처럼, 시위대와 진압하는 쪽 모두 거칠게 대응한 날이었다. 이 날, 아무 것도 모르고 길을 걷다가 시위대에 휩쓸려 길거리에서 소지품을 잃고 방황하는 윤, 윤을 발견한 명서, 새 운동화를 갖다 주는 미루, 이렇게 해서 셋이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미루가 키우는 고양이 에밀리-신기하게도 윤이 단이에게 준 시집(에밀리 디킨슨 시집)의 시인 이름과 같은- 에밀리이다. 만날 듯 하면서 만날 것 같지 않았던 인물들 사이에 묘한 연결고리가 있다.
걷기 모임이 시작되는 장면에서는,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걷기 멤버 수가 늘어나고 여러 에피소드가 전개되어 재미있었다. 그리고 걷기 모임에서는 누구보다 낙수장이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낙수장은 실존하는 건축물 이름이면서 등장인물의 별명이기도 하다- 건축가가 꿈인데 어찌하다 예대로 왔구나. 그리고 이 걷기 모임에서 뜻밖의 장면이 등장하기도 해서 인상이 깊었다. 두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한쪽은 진지하게, 한쪽은 장난처럼 시작했으나 점점 상대에게 빠져드는 모습.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다. 슬픔이고 절망이기도(155-157p) 하지만 그 문장을 읽으니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런 부분이 또 나오지만 웃음이 나온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지하게 듣게 되는 것 같다. 더구나 그 장면에서는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어 버린 단이 때문에 괴로워 하는 윤이 보였고, 윤을 달래주려는 명서의 마음이 보였기 때문에. 그렇지만 함께 있으면 불행하게 될 거라는 명서의 말, 에 뭔가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럴 만하다, 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아쉬웠다. 왜 이 둘은 잘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될까. 한편, 명서, 윤, 미루의 문장 이어쓰기 놀이도 의외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지만 지금 우리 세대에게 이런 놀이를 해 보라고 하면 이들만큼 많이 써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윤교수는 시인이면서 교수일을 병행하고 있다. 이들이 다니는 대학에 다른 교수들은 보이지 않고, 명서는 듣고 싶은 강의는 윤교수 강의 뿐이라고 갈색노트(자신이 들고 다니는)에 쓴다. 윤교수는 그는 첫 시간에 단순히 오리엔테이션으로 끝나지 않고,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물이 불어났다고 해서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네.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윤교수의 목소리는 더욱 나직해지면서 힘이 가해졌다. (63p)
단순 강의 소개로만 끝날 수도 있었던 시간에 학생들에게 확실히 각인을 시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 '크리스토프' 는 학생들이 졸업하고 다시 모일 때까지 여전히 커다란 주제로 남게 되는 것 같다. 크리스토프.. 그는 자기 자신을 바칠 존재를 찾는 일에 지쳐 실의에 빠져 있던 중에, 강을 건너려 하는 여행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예수를 건네 주고 나서(처음에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던) 세상 전체를 어깨에 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윤교수는 학생들에게, 혼란스런 시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 주라고 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토프는 강의 첫 시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이 흘러도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나중에 윤교수는 대학을 그만 두면서 제자들에게 길다란 편지를 남겼다.
…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291p)
그 편지 중 마지막 부분이다. 직업 특성상 그런 것이었을까?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넓게 그 시대를 느끼는, 시인으로서의 특성이었을까?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의 손바닥에 한 구절 한 구절씩 쓰는 모습도 시인다웠다.
대학에 다닐 때와 같은 말을 몇 년 후에도 듣는다면, 윤의 말대로,'오래전 일들이 바로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재현되는 것 같은 그런 순간'에 놓이게 될까?시간이 오래 되어 연락이 끊기는 것 같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가 올지 모른다. 어쩌면, 윤교수가 학생들에게 남긴 것처럼 특별한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서문에서 공기의 세계, 흙의 세계, 불의 세계, 물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는 길. 나의 기원을 만나고, 나아가 나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를 만나는 여행. 나와의 싸움에서 이긴 나를 보는 여행이다.
책 속 화자가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 자신이 여행을 하는 책이다.
여행을 쭈~욱 하고 싶으면 계속 읽고, 싫으면 덮어 버리면 그만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베르베르 소설을 읽다 보면 평소에 잘 쓰지 않은, 혹은 잊고 있던 우리말들이 종종 등장한다. (읽다 말고 일일이 찾아보고 싶을 정도이다. 그나마 이건 얇으니까 다행인데 다른 건 길어서, 그 두꺼운 개미를 읽을 때 잠깐 메모를 해 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 개미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번역하신 분이 언어를 잘 선택하시는 것 같다.
-소설이 끝나고 맨 마지막에.. 부록(?)이라 할까.
작가가 집필을 하면서 들었다는 노래들이 나와 있었다. 거의 다 모르는 곡이지만 한 번쯤 찾아서 듣고 싶은 곡이다.
'뉴욕, 아이러브 유'는 '사랑해, 파리(2006)'처럼 옴니버스식 영화이다. 이런 옴니버스식 영화의 장점이라면
상영시간 동안 여러 가지 스토리를 보고, 여러 배우들을 보고 그 장면들을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 반면에 단점이라면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 끊기니까 시청자들(옴니버스식 진행을 싫어하는 시청자들)이 그걸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들에게 ‘이것이 뉴욕이다’ 라고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어쩌면 뉴욕에 대해 품고 있었던 환상이 깨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뉴욕도 지구상의 한 도시일 뿐이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랑하고 그렇게 지내는 곳이다, 라고 보여 주는 것 같다.
전작인 '사랑해 파리'에서는 지금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몇 개 있었는데 뉴욕 편은 그나마 파리보다는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결국 사랑의 빛깔(?)은 어디서든 마찬가지인 것일까 ?
+) 보면서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그냥 받아들여도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러 배우들...어디선가 봤는데...낯익은 얼굴들이 많아서 반가웠다.
작년에 본 블랙 이후로 장애 관련 영화를 또 보게 되었다. 블랙은 여럿이 눈물 콧물 훌쩍거리면서 봤는데, 이건 혼자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픽션인 블랙을 눈물을 흘리면서 봤는데, 실화인 이것을 볼 때는 눈물이 그 몇 배로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끝까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른 눈을 가끔씩 깜박거려 가면서, 조금은 무덤덤하게 본 것 같다.
가비(가브리엘)과 유모의 첫 만남, 발을 이용한 의사소통, 가비의 학교생활, 좌절, 실패, 성공, 유모의 헌신, (왠지 가족이 유모만큼 헌신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비 집안의 재력은 상당한 것 같은데,
그 가족들의 정신력이나 의지력 등 이런 것들이 왠지 돈을 따라가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비가 사립 특수학교(아마도 사립인 듯)를 졸업하고 나서 공립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까지 진학하였는데, 이 때 부모나 다른 가족의 격려라든가 이런 것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요양원에 있던 가비의 모친이 돌아올 때 집안을 가득 채운 그 꽃들 하며-, 그 꽃뿐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돈의 힘을 얼핏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많은 꽃을 치우는 건 전부 유모의 몫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유모.. 자기의 인생을 희생하면서까지 가비를 돌본 유모. 아마 유모도 처음엔 그냥 예쁜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집 주인님이 예쁜 딸을 낳았네 라고 생각했을 듯. 그러나 가비가 신체의 다른 부분은 사용할 수 없고, 발을 이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처음 밥을 주게 된 사람은 부모가 아닌 유모였다. 나아가 학교생활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도와주어야 했고, 글을 몰랐던 그녀지만 가비와 같이 공부를 하게 되면서, 글을 읽게 되고, 가비가 발로 하나씩 짚는 알파벳 판을 다 읽어서 일일이 통역을 해 주는 등... 유모는 공부를 돕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유모는 자신의 가족, 친척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떠나려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가비가 나중에 유모에게도 고맙다고 영화 말미에 인사를 한다. (그렇지만 그 인사 한 줄과 바꾼 그녀의 인생은? ) 영화 초점은 가비의 인생에 맞추어져 있지만, 유모도 지나칠 수만은 없던 캐릭터였던 듯. 주인공은 가브리엘이지만 내게는 유모가 더 크게 보였다.
가비같은 사람에겐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 역할을 유모가 혼자 담당하기엔 너무 버겁지 않았을까. 적어도 내 눈엔 유모가 1인 다역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