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걷는 학생들이 그들을 찾는 전화 한 통 때문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 전화는 학생 시절 자신들에게 끝없이 ‘생각하기’를 요구했던 윤교수의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을 부르는 전화였다. 8년 만에 전화를 건 친구에게 "어디야?" 라고 담담하게 묻기만 할 수 있을까.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친 친구도 아니었는데. 소설 속 등장인물들(윤, 명서, 미루, 단)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 답답한 시대 속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단지 시간이 오래 지났을 뿐,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 대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하루하루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거리로 나선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쫒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106-108p)
이들이 다니는 대학은 예대 특유의 분위기랄까, 이런 것이 있어서 무슨 돌아이(!)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곳이다.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지만 윤은 그 개성이 강한 사람들 속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을 하고 다시 복학을 하게 되었다. 윤이 사촌언니네 방 창문에 검은 도화지를 붙이고 밤낮없이 책만 읽는 모습은 좀 무서웠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학교는 왜 다니는지 모르겠고, 길거리는 시위대, 화염병, 바리케이드 천지고,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꼭 검은 도화지를 붙였어야 할까. 이 때 윤의 눈에 띈 사람들이 명서, 윤미루, 윤교수였다. 하지만, 윤교수가 텍스트 타이핑을 할 사람을 찾지 않았더라면, 윤이 명서와 미루를 주의깊게 살펴 보지 않았더라면, 이들이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비록 학교 밖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윤을 포함한 이들은 대학생으로서 일종의 특권을 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마주치고, 여러 번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답답한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는 건 공통점일 수 있으나, 여기서 이들은 지금 우리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 학점과 취업에 목을 맨- 현실과 너무도 달라서 끌리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우리 중에 ‘쉴 새 없이 노래부르거나 한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것(29p)' 을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성곽 순례, 문장 이어쓰기 놀이 등. 이런 것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 '걷기'는 윤이 서울 생활을 하면서 시작한 새로운 취미생활이었다. 아마도 이 ‘걷기’가 아니었더라면 윤은 1년 전 명서와 만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필 그날은 명서의 말처럼, 시위대와 진압하는 쪽 모두 거칠게 대응한 날이었다. 이 날, 아무 것도 모르고 길을 걷다가 시위대에 휩쓸려 길거리에서 소지품을 잃고 방황하는 윤, 윤을 발견한 명서, 새 운동화를 갖다 주는 미루, 이렇게 해서 셋이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미루가 키우는 고양이 에밀리-신기하게도 윤이 단이에게 준 시집(에밀리 디킨슨 시집)의 시인 이름과 같은- 에밀리이다. 만날 듯 하면서 만날 것 같지 않았던 인물들 사이에 묘한 연결고리가 있다.
걷기 모임이 시작되는 장면에서는,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걷기 멤버 수가 늘어나고 여러 에피소드가 전개되어 재미있었다. 그리고 걷기 모임에서는 누구보다 낙수장이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낙수장은 실존하는 건축물 이름이면서 등장인물의 별명이기도 하다- 건축가가 꿈인데 어찌하다 예대로 왔구나. 그리고 이 걷기 모임에서 뜻밖의 장면이 등장하기도 해서 인상이 깊었다. 두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한쪽은 진지하게, 한쪽은 장난처럼 시작했으나 점점 상대에게 빠져드는 모습.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다. 슬픔이고 절망이기도(155-157p) 하지만 그 문장을 읽으니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런 부분이 또 나오지만 웃음이 나온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지하게 듣게 되는 것 같다. 더구나 그 장면에서는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어 버린 단이 때문에 괴로워 하는 윤이 보였고, 윤을 달래주려는 명서의 마음이 보였기 때문에. 그렇지만 함께 있으면 불행하게 될 거라는 명서의 말, 에 뭔가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럴 만하다, 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아쉬웠다. 왜 이 둘은 잘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될까. 한편, 명서, 윤, 미루의 문장 이어쓰기 놀이도 의외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지만 지금 우리 세대에게 이런 놀이를 해 보라고 하면 이들만큼 많이 써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윤교수는 시인이면서 교수일을 병행하고 있다. 이들이 다니는 대학에 다른 교수들은 보이지 않고, 명서는 듣고 싶은 강의는 윤교수 강의 뿐이라고 갈색노트(자신이 들고 다니는)에 쓴다. 윤교수는 그는 첫 시간에 단순히 오리엔테이션으로 끝나지 않고,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물이 불어났다고 해서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네.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윤교수의 목소리는 더욱 나직해지면서 힘이 가해졌다. (63p)
단순 강의 소개로만 끝날 수도 있었던 시간에 학생들에게 확실히 각인을 시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 '크리스토프' 는 학생들이 졸업하고 다시 모일 때까지 여전히 커다란 주제로 남게 되는 것 같다. 크리스토프.. 그는 자기 자신을 바칠 존재를 찾는 일에 지쳐 실의에 빠져 있던 중에, 강을 건너려 하는 여행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예수를 건네 주고 나서(처음에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던) 세상 전체를 어깨에 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윤교수는 학생들에게, 혼란스런 시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 주라고 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토프는 강의 첫 시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이 흘러도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나중에 윤교수는 대학을 그만 두면서 제자들에게 길다란 편지를 남겼다.
…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291p)
그 편지 중 마지막 부분이다. 직업 특성상 그런 것이었을까?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넓게 그 시대를 느끼는, 시인으로서의 특성이었을까?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의 손바닥에 한 구절 한 구절씩 쓰는 모습도 시인다웠다.
대학에 다닐 때와 같은 말을 몇 년 후에도 듣는다면, 윤의 말대로,'오래전 일들이 바로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재현되는 것 같은 그런 순간'에 놓이게 될까?시간이 오래 되어 연락이 끊기는 것 같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가 올지 모른다. 어쩌면, 윤교수가 학생들에게 남긴 것처럼 특별한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